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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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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생 여러분이 진정한 애국자 입니다.

미국 유학 전인 1918년 3월 이화학당 졸업 직후부터 이화학당 고등보통과의 교사로 활동했다. 1919년 이화학당 교사 재직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비밀결사에 참여했다. 1920년 6월 '이화전도대'를 결성해 전국 각지를 돌며 농촌계몽과 복음 전도활동을 했다. 1922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세계기독교청년연합회에 김필례와 함께 조선여성 대표로 참석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23년 3월 김필례, 유각경 등과 함께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를 창설했다. 귀국해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 겸 학감을 맡아 1930년 6월까지 재직했다.

1927년 1월 전문직 여성들의 친목모임인 망월구락부가 직업부인회로 개편될 때 실행위원에 선정되었다. 같은 해 4월 유영준, 유각경, 최은희, 황신덕, 주세죽[4] 등과 함께 근우회 창립준비위원을 맡았고, 5월 근우회 창립 때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 시기 김활란은 계몽운동과 인권운동에 힘쓴 동시에 독립운동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1931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땄는데, 한국 여성 최초의 박사이다. 이듬해 1932년 9월부터 1939년 8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서 학감 및 부교장을 지냈으며, 재직 중이던 1935년 11월 잠시 교장 대리를 맡았다. 이 무렵 농촌 교육을 통한 문맹퇴치와 계몽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개신교 단체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김활란의 행적은 상당히 '개념인'이었다. 그러나 1936년 전후로...

악질 친일파로 변절했다. '아마기 가츠란'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한 것은 물론이고, 1936년 말부터 갑자기 교육과 여성계몽 분야에서 친일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관제단체에는 거의 다 참석하고, 매일신보정신대 참여를 적극 독려하는 글을 수백편 쓰는가 하면 내선일체 찬양글도 엄청 많이 썼다. 특히 전시체제에 가면 갈수록 더욱 활발히 활동하게 된다. 심지어 김활란은 자신의 여제자들을 정신대위안부로 보냈다.[5] 그 외 자세한 친일 행위는 여기를 참고할 것.

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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