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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벽에 매달린 엄마아빠들의 피울음을 나는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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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벽에 매달린 엄마아빠들의 피울음을 나는 잊지 못한다


[르포] 그 날을 떠올리며…정은주 기자의 ‘동거차도 3일’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단체 활동가, 취재진이 지난 22일 저녁 전남 진도군 동거차도에 있는 세월호 지킴이 텐트 앞에 나와 세월호 시험인양 중인 재킹바지선을 지켜보고 있다. 진도/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단체 활동가, 취재진이 지난 22일 저녁 전남 진도군 동거차도에 있는 세월호 지킴이 텐트 앞에 나와 세월호 시험인양 중인 재킹바지선을 지켜보고 있다. 진도/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세월호의 ‘마지막 항해’를 배웅하는 길을 나선다. 2014년 4월16일 그날 이후 몇차례나 되풀이하는 동행인데, 발걸음은 늘 무겁다. 2014년 7월8일 아들을 잃은 두 아버지와 800㎞ 도보 순례를 떠날 때도, 2016년 3월 재단법인 ‘진실의 힘’과 세월호 기록 15만쪽을 모은 책 <세월호, 그날의 기록>을 펴낼 때도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그날의 고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피해자 가족과 마주하는 일도, 참담한 대한민국의 민낯을 낱낱이 확인하는 일도, 내 무능력과 무기력함에 절망하는 것도 깊은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다.

24일 오전 9시50분께 도착한 동거차도. 해발 100m를 조금 넘는 산마루에 있는 감시초소까지 오르는 산길은 노란 천조각이 수를 놓았다. “사랑하는 아들 영원히 빛나길.” “멋진 아들, 착한 모습으로만 기억되게 해줘서 감사해.” “아빠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항상 행복하렴, 내 아들 보고 싶다.” 아이들의 이름과 함께 그리움을 담은 글을 읽다 보니 가슴이 메어왔다. 어른 둘이 나란히 걸을 수 없는 좁은 산길은 20분간 이어진다. 울창한 대나무숲을 지나 발전기가 있는 우물을 거쳐 요란한 소리가 희미해질 때쯤 산머리에 닿는다. 산머리엔 돔 모양의 흰색 텐트 2개와 파란색 천으로 감싼 움막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사고 현장을 취재하던 방송사가 뼈대만 남겨놓은 움막을, 유가족들이 2015년 9월에 고쳐서 감시초소로 만들었다. 그 후 아빠 엄마들은 먹을거리와 생필품을 지게에 지고 하루도 빠짐없이 이 길을 걷고 있다.

초소가 있는 산마루에 오르니 바다가 한눈에 펼쳐졌다. 동거차도에서 1.3㎞ 떨어진 재킹바지선에 매달려 떠오른 세월호는 왼쪽으로 누운 채 바닥을 보여주고 있었다.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파란색 바닥이 보였다. 그 주변엔 세월호 인양 업체인 중국 상하이샐비지의 크레인 작업선과 보급선, 방제선 등이 떠 있었다. 이날 세월호는 예인선 5대에 이끌려 3㎞ 떨어진 반잠수식 선박으로 이동할 참이었다. 세월호는 이날 오후 5시께 이동을 시작해 밤 0시50분께 반잠수식 선박에 다다랐다. 밤이 되자 아빠들은 배 불빛의 색깔과 모양, 엔진 소리로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상하이샐비지가 야간작업을 많이 하는 탓에 아빠들의 눈과 귀가 그만큼 밝아졌다.

동거차도에서 7.5㎞ 떨어진 병풍도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웠다. 세월호 사고 지점을 흔히 맹골수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병풍도 앞바다다. 선원들이 4.9㎞ 좁은 수로인 맹골수도를 빠져나와 병풍도와 관매도 사이를 지나고 나서야 “맹골수도를 통과했다”고 일상적으로 말해, 초기에 잘못 알려졌다.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45분께 세월호는 병풍도 앞바다에서 제주도로 향하기 위해 뱃머리를 135도에서 천천히 140도로 바꾸었다. 2분간 항해를 계속하다가 8시49분께 배가 갑자기 낚싯바늘 모양(알파벳 J 모양)으로 빠르게 오른쪽으로 선회했다. 왼쪽으로 30도가량 기울어진 채 엔진이 멈췄다. 배는 동거차도 방향으로 표류하다가 10시30분께 뱃머리만 남기고 가라앉았다. 세월호의 마지막 흔적을 부표 3개가 삼각형 모양으로 표시해두고 있었다. 만약 그날 이 산마루에서 섰다면, “퇴선하라”라는 방송을 하지 않은 해경과 선원들 탓에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히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빠 엄마들은 이 산마루에 올라오면 일단 울고 만다. 몇번을 찾아와도, 몇날을 머물러도 산마루에 서면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들리는 듯해 울지 않을 수 없다.

25일 오전 10시께 차돌이가 꼬리를 흔들며 바다 쪽 길로 내려가자고 조른다. 10개월 전 유가족 한 명이 분양받아 데려다 놓은 진돗개다. 초소에서 자란 차돌이는 아빠 엄마가 가는 길을 꿰뚫고 있었다. 바다로 향하는 좁고 가파른 길은 세월호와 가장 가까운 절벽에 닿아 있다. 이 길은 아빠 엄마들이 낫과 ‘정글도’로 허리까지 자란 풀을 베어가며 닦았다. 절벽으로 가는 길 역시 노란 물결이 넘실댔다. 붉은 진달래가 핀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노란 천조각은 바닷바람에 낡고 해졌다. 차돌이는 2015년 9월 아빠들이 “9명의 미수습자 가족이 기다립니다”라는 펼침막을 내걸고 텐트를 친 절벽으로 이끌었다. 이곳에 망원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놓고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봤을 엄마 아빠들이 그려졌다. 이 절벽에 서서 아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고 했다.

나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애끓는 목소리를 기억한다. 2014년 4월20일 밤,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들은 진도체육관의 형광등을 환하게 밝힌 채 아이의 이름을 신음처럼 부르다 쓰러졌다. 링거를 꽂고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입술로 아이를 불렀다. 팽목항에선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굳어버린 부모들이 아이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웠다. 멀리서 보이는 조명탄을 바라보며 희뿌옇게 날이 밝을 때까지 이들은 얇은 담요 한장으로 차가운 바닷바람을 견뎠다.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고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에서 출발한 두 아버지가 2014년 7월28일 21일간 걸어서 팽목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초상 화가에게 아들의 초상화를 선물받고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가슴이 아파 차마 부르지 못했던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꼈다.

26일 오전 7시께 반잠수식 선박에 올라앉은 세월호가 보였다. 사고 현장에서 멀어졌지만 카메라의 망원렌즈로 잡아당기면 그 모습이 선명했다. 반잠수식 선박은 세월호의 물을 빼고 방제작업을 하며 조류 방향에 따라 360도 회전을 반복했다. 이 작업이 끝나면 세월호는 목포신항으로 ‘마지막 항해’를 떠날 것이다. 유가족들도 분주해졌다. 세월호 선체 수색작업을 지켜보기 위해 목포에 숙소를 마련하고 세월호의 마지막 항해에 동행할 준비에 나섰다. 그러나 정부는 구조 상황을 알려주지 않았던 2014년 4월16일 그날처럼, 유가족들에게 인양 상황을 알려주지 않고 있다.

진도/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88102.html?_fr=mt2#csidxc4a4b864da6bcaab4f29237b8f374cd 


제발 부탁 합니다. 새월호 인양 미수습 시신도 있는데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이것저것 따져서 나쁜짓 하지 말고 편하게 올려주세요.

진짜진짜 피눈물 납니다.